어렸을때에는 설만되면 전날부터 잠도 못 이룰 만큼 설렘에 가득찼습니다. 가부좌를 틀고 일렬로 앉아 계신 어른들께 절만하면 붉고, 푸르스름한 지폐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두손으로 쥐어야 다 잡을 수 있을 만큼의 작은 종이였지만 그 가치를 몰랐던 저에게는 주니까, 혹은 옆에 계신 어른들이 "와~ 받아라 빨리.." , "와~ 너 오늘 땡잡았네 하하" 라며 부추기니.. 어쩔 수 없이 몸을 배배 꼬면서 후딱받아서는 어머니 치마폭에 쏙~ 숨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받은 세뱃돈은 제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부모님의 주머니로 들어갔죠. 다음날이면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어렸을때 설에 대한 이런 추억들은 누구가 가지고 있을 법한데요.  살면서 지울수도 없고, 지워지지도 않는 소중한 추억입니다. 먼 친척들이 함께모여 그 간의 안부도 묻고, 한해를 맞이하는 뜻깊은 자리인 설은 우리나라의 큰 명절중 하나입니다. 이런 의미를 가진 명절인데도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친구녀석이 두명있습니다. 그 친구들이 고향을 못 가는 이유도 있지만.. 안가는 이유도 있겠죠.

고향친구들과 연락을 해서 내일 저녁에 한자리에 모이기로 했습니다. 거의 초등학교 동창회겸~ 친목회겸~ 모이는 자리인데요. 딱히 명절때가 아니면 모이기 힘들어서 매년 설날과 추석때만큼은 고향에 온 친구들은 꼬박꼬박 모이고 있습니다. 같이 코흘리며 지냈던 유년기 친구들을 볼때면 감회가 새롭기도 합니다. 얼굴이 찢어지도록 싸우기도 하고 팬티하나 입은채로 강물에서 멱을 감고 논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도 하는데요. 그런데 한 친구녀석은 몇년째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네요. 직장에 다닐때만해도 매년 고향에 찾아왔는데.. 이 친구가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 이후로 얼굴을 본 기억이 없네요.


   공무원 시험본다는 친구는 4년째 코빼기도 안보여..


이 친구는 공무원 준비를 한지 올해로 4년째입니다. 보통 1~2년만 하면 붙는다던데.. 이 친구는 꽤 오랫동안 준비를 하네요. 대학졸업하고 중소기업에 다녔다가 중간에 회사를 나와서 공무원 준비를 하는 친구입니다. 그렇게 만류를 했건만.. 제 뜻을 굽히지 않았떤 친구인데요. 이 친구가 설에도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기로 한 이유는 올해 4,5월에 잡힌 국가직,지방직 공무원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며칠 시간내서 친지들을 찾아뵙고 인사도 드리면 좋으련만 굳이 설 당일 마저 혼자 쉬기로 했답니다.

친지들의 한마디가 촌철살인. 이 나이 되도록 변변한 직장하나 없이 새파란 대학후배들과 학교 도서관에서 츄리닝차림에 공부를 하는 자신이 친지들을 볼 면목이 없답니다. 그래서 저는 '니 꿈을 위해 몇년 투자하는 시점에서 그게 무슨 창피한 일이냐?'고 묻자 그 친구는 '이런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올해가 마지막일지.. 내년이 될지.. 후년이 될지도 모른다' 면서' 내 꿈을 이룰때 까지는 명절때 고향에 가지 않겠다'라고 합니다. 시험이 코앞에 다가와서 자신감을 갖기 위해 페이스 조절을 해야 하는데.. 명절때 고향에 내려가면 엄친아, 엄친딸 등등.. 듣는것도 많이지고 보는것도 많아셔서 페이스가 깨질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하는 스터디맴버들도 명절에는 전화만 드리고 고향이나 큰집에 가지 않는다고 하네요. 설날 당일에는 같이 공부하는 스터디맴버들과 간단히 저녁만 먹기로 했다고 합니다. 털털하고 재미있는 친구였는데.. 몇년 공무원 준비하면서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이번에는 꼭 합격해서 추석때 고향을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서른 중반에 미혼인 친구는 핑계대고 안가..


이 친구는 고향친구가 아닌 대학 동창인데요. 나이는 저보다 한살 많은데.. 어쩌다 보니 친구를 먹게 되었습니다. 같은과 동기인데요. 재수해서 들어온지도 모르고 "야~야~" 하면서 지내다가 일년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뭐라 불러야 하나.. 고민하다가 "형"이라고 불리는도 어색하니, 그냥 친구먹자고 해서 그냥.. 예전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친구는 직장은 있지만 미혼입니다.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빨리 결혼도 해야 하는데요. 작년에는 중매도 서너번 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 짝을 못만났나 봅니다. 

이 친구 부모님께서는 빨리 색시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하길 간절히 원하는 눈치이지만... 아들앞에서는 괜히 말을 못하고 계십니다. 부추기는 것도 한두번이지.. 한마디 했다가는 괜한 과잉반응을 보이는 아들모습이 보기 싫으신 거겠죠. 친지들의 말은 더 하다고 합니다. 몇년만에 만나는 고모, 이모가 "여자친구 있니?" , "너도 빨리 결혼해야지~" , "OO는 올 가을에 날 잡았다더라" 등등등.. 친척동생들을 주제로 이야기 꽃을 피우는데.. 괜한 자격지심이 들어서 가기 싫다고 하네요.

이런 말을 하는 친지들이 부담스러워서 저번주에 미리 고향에 갔다 왔다고 합니다. "설날에도 내려갈껀데 왜 벌써 내려갈라고?" 라고 묻자 "그냥~" 이라고 얼버무리는 친구의 모습이 수상했었는데.. 알고보니 이런 속내가 있었네요. 집에서는 설날 비상근무체제라 회사나가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느정도 이해는 되지만.. 금의환양을 꿈꾸는 이 친구들이 안타까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 겠지요. "그래도 명절인데 가봐야 하는거 아냐?"라고 물었지만.."후~ 글쎄다~" 라며 대답을 얼버무리는 친구들에게 딱히 해 줄 말이 없더라구요. 빨리 직장을 구하고 결혼도 해서 자리를 잡아야 할텐데.. 다른 친구들은 비슷한 상황에서도 고향에 내려가던데.. 유독 이 두 친구만 이러고 있네요.떡국은 잘 챙겨먹었는지.... 설 끝나고 이 녀석들 밥이라도 사줘야 겠습니다.

나이가 30대 초, 중반에 들어서는 만큼 결혼과 직장문제는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등학교때는 수능이 인생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 생각을 했었는데.. 나이 먹고나니 지금 이 시기는 결혼과 직장 문제가 가장 커보이네요. 지금 이시기에 이런 문제로 주눅들지 말고 이 친구들이 잘 해쳐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친구들아 ~ 어깨 쭉펴고 힘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