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년전. 어느 화창한 가을.. 가을이면 항상 어머니는 어디서 가져오셨는지.. 빨갛게 익은 고추를 두포대씩 가져 오셨다. 내 기억으로는 쌀한포대 보다 더 양이 많았었다. 1년내내 먹을 고추가루를 직접 만들어 먹어야 한다면서.. 매년 가을이면 벌어지는 우리집만의 연례 행사였다.

"엄마~ 이거 또 가져왔어?"
"...."
"고생이네 고생~"

고추 말려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침에 널고 저녁에는 걷어서 아파트 베란다에 고이고이 모셔둬야 한다. 몇년 전에는 고추 걷기가 귀찮아서 그냥 널어 둔 적이 있는데.. 새벽에 내린 이슬비에 홀라당 젖어서 반 넘게 썩는 바람에 돈은 돈대로, 고생은 고생대로 한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항상 가을 고추를 말릴때면 온 가족이 바싹 긴장해야 한다.

그날도 하늘을 보니 구름 한점없는 만년 가을 날씨였다. 여름 햇볕은 살을 파고 들정도로 아프다고 치면, 가을 햇살은 그보다는 약하지만, 뭔지 모르게 깊숙하게 파고드는 느낌이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가을 햇살에 말린 고추가 맛있나 보다. 어머니와 함께 고추가 담긴 커다란 보자기를 낑낑대고 옥상으로 가지고 올라가 널었다. 고추가 겹치기 않게 손으로 대충 훑어 주어야 하는 일도 빼먹지 않는다.

그날은 휴일이라.. 집에서 느긋하게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일이 발생한것은 그 후로 몇시간 지나지 않아서 였다. 갑자기 벽에 붙어 있는 스피커에서 치지직 소리가 나더니...


(띵~동~댕~동~♪ . 치지직~ )
"(마이크 톡 톡~) 아~ 아~ 관리소에서 알려 드립니다아아~ . 지금~ 105동 옥상에서~ 고추가 날라다니고 있으니~ 옥상에 고추를 널으신 세대께서는~ 속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여기까진 교과서를 읽는 듯한 관리소용 목소리) (비 관리소용 호들갑 목소리~;;) 지금 주차장까지 다 떨어져서 난리 났어요~ 난리~"

105동? 우리동인데.. 고추가 날라다닌다고? 설마설마 했다. 옥상에 고추를 말리는 집이 한두집이 아니었기에.. 나는 우리집 고추가 아니길 바랬다. 상대편 저그가 내 본진을 싹 쓸어 버릴때쯤 컴퓨터 전원을 끄고 (나이스 타이밍~ -_-;;) 옥상으로 부리나케 뛰어 올라갔다.

옥상의 풍경을 보고 멍~ 하니 정신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바닥에 보자기를 깔고 네 귀퉁이를 벽돌로 눌러놨는데도.. 보자기는 바람에 날려 미친x 치마자락처럼 마귀 휘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방에는 고추가 마구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더 심각한것은 옥상에 고추를 널어둔 집이 우리집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잠시후 옥상문이 삐그덕~ 열리더니 105동에 사는 주민들이 하나둘씩 옥상으로 집결? 하고 있었고.. 그들도 멍~하니 정신을 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 고추가 내 고추냐~ 저 고추가 내 고추냐~ 그것이 문제로다~@@"

바람에 날려 옥상에 있던 고추들은 반은 아래로 떨어져 주차장이며 화단의 나무며~ 안날라 간 곳이 없었고, 나머지 반은 ㄱ자 모양의 옥상 귀퉁이에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고추를 주워서 이걸 세대별로 나누는 것도 웃기고, 어느집에 얼마나 나눠줘야 하는지도 계산하기 힘든 지경이었다. 고추에 이름을 써놨으면 모를까..;; 결국엔 관리소 아저씨 지휘아래.. 각 세대가 양심껏 가져가기로 하고 서로 손해보는 듯~ 할 정도로 나눠 가졌다.

이것저것 섞인 고추가루라서 그런지.. 그 해 담은 김치맛은 정말 -_-;; 왜 어른들이 고추가루를 잘 써야 한다고 하는지 알게 된 경험이었다. 며칠전부터 옥탑방 주인아주머니께서 옥상에다가 고추를 널고 계시는걸 보니 갑자기 옛날 아파트 옥상사건이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