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뀌기 전까지만해도 공무원이라는 직업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친구 세명이 공무원 준비를 시작한다며 학원을 등록한지가 벌써 4년이 지났군요. 지방대 인문대를 졸업 후, 취업불황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공부를 하는 중에도 그들은 꽤 만족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평생직장도 이만한게 없다!, 연금도 빵빵하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의 신분이 아니라, 마치 공무원이 된것 처럼, 바로 합격할것 처럼.. 자랑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세명의 친구중에서 한명빼고는 각각 3년전, 2년전에 합격을 했습니다. 결국 한명만 남은 셈인데..나름 장수생인겁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친구는 통 합격소식이 없더라구요.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하면 전화도 잘 안받던 놈이 왠일로 밤늦게 하더군요.


공무원 시험준비만 4년째, 사람이 변했다.


"1,2,3년 순으로 합격을 했어야지~ 올해는 어떻게 합격 할래?ㅎㅎ" 라며 던진 농담이 거의 마지막 농담인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던 거죠. 예전같으면 농담으로 맏받아 칠 놈인데, 자리를 박차고 그냥 나가더군요. 다음날 바로 풀기는 했지만, 그 담부터는 저절로 말조심하게 되더군요. 

그 친구가 다니는 독서실 근처에서 만난 후, 가까운 술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작고 허름해 보이는 곱창집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웃음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표정이 굳어져 있었습니다. 장발의 머리를 하고, 츄리닝에 검은색 가방을 맨 그 친구는 마치 고시준비생처럼 보입니다.

숯불 곱창.

오랜만에 만나, 처음에는 반가워서 인사 몇마디를 주고 받고는 그 다음부터는 별로 말이 없더라구요. '이녀석이 공부하느라 힘들어서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인터넷에서 본 재밌는 얘기를 몇개 해주는데, 이 친구가 저를 보고는 있지만 귀는 닫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고개만 끄덕일뿐.. '내가 지금 뭐라고 했게?' 라고 되물으면 대답 못할것 같았습니다. 술자리에서 혼자 떠들려니 그것도 고역이네요. 맞장구도 쳐주는 맛이 있어야지~ "어. 그래? 아~ 그래? 음~ 그래?" 이런 대답만 듣고 있으려니 저도 슬슬 지치더군요. 간혹 혼자 중얼중얼 거리며 뭘 외우는 모습을 보이기도하고,...  술에만 관심이 있지 저는 별 상관안하는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의 생활을 중심으로 많은 걸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한참후에야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점점 장기전이 될수록 자신감이 없어지고 슬럼프도 자주 찾아오고, 가끔 공무원 수험서에 적힌 까만 글씨와 깨알같은 메모를 보고 있자니 오바이트가 나올라고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다음달에 지방직 공무원 시험[각주:1]이 있습니다. 그 시험을 목표로 공부했는데.. 이 중요한 시기에 슬럼프가 찾아와서 힘든 모습입니다. 게다가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은 먼저 합격해서 나갔으니, 겉으로 티는 안내지만, 많이 힘들었겠지요.

이런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요? "정신차려! 이 놈아 시험이 한달 남았는데 지금 술이 들어가?" 라며 호통을 쳐야 할까요? "어? 그래? 그래도 잘 이겨내야지. 이럴때일수록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해야 돼" 라며 틀에박힌 말투로 공자왈~ 맹자왈 해줘야 할까요?....."이번에는 되겠지~ 걱정마.. 다 잘될꺼야" 라는 말이 입밖에 나오려는 순간, 지금 이 친구에게 해줄 말이 이 말은 아닌것 같아서 말았습니다. 

우리는 말없이 시선을 TV에 고정하고는 소주한병을 더 비웠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TV에서 떠드는 소리가 하나도 안들리더군요. '내일이 아니니 상관없잖아~'라며 애써 모른척하고 제 얘기만 할 수도 있겠만 그럴 상황은 아닌것 같고. 그날은 그냥 거의 말없이 그냥 술만 먹다가 헤어졌네요.


'늪'에 빠진 친구, 소망일까 미련일까?


제목을 "공무원시험이란 늪에 빠진 30대"라고 표현한 이유는, 현재 상황에서 공무원이 되지 않으면 지금와서 그보다 더 좋은 직장을 가진다는 보장이 없고, 공무원 공부를 때려치려해도 몇년간 공부해둔게 아까운 생각에 쉽사리 그러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려칠까? 아냐, 딱 1년만, 딱 1년만' 그게 지금 벌써 4년째 입니다. 2년째 되던해에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모두 합격했고, 자기 혼자만 남았을때 정말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1년만 더 해보자고, 그래도 안되니 1년만 더해보자고 한게 지금까지 왔네요. 그런데 이제는 될때까지 한다고 합니다. 20대였다면 그냥 포기했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그 동안 공부한게 너무 아까운 모양입니다.
 
공무원 수험생의 신분이 점점 길어질수록 합격의 순간이 가까워지겠지만, 그 만큼 직업선택의 폭도 줄어듭니다. 29과 31살의 무직자가 느끼는 차이 정도? 28과 32? 27과 33... 나이가 먹을 수록, 그 체감은 더 커질 수 밖에요. 

@그남자의 책 198쪽

소망일까 미련일까


이런 와중에도 이 녀석이 술자리에서 던진 단 하나의 우스개소리........;

"OO 강사가 그러던데 , 수험기간이 길어지면 공무원이 직업이 되는게 아니라, 수험생이 직업이 될 수도 있다네? 그러면 내 직장은 독서실 21번 자리인가?ㅎㅎ;;;;;"


절 웃기려고 한 소리인데.., 농담같지 않은 농담이군요. 곱씹어 보니 많은 뜻을 내포한 문장입니다.

비록 슬럼프에 빠져있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니 잘 이겨내리라 믿습니다. 지금은 돈도 없고, 허름한 츄리닝을 입고 다녀도, 언젠가는 허물을 벗고 멋진 나비가 되길 응원하는게 제가 해줄수 있는 전부네요. 진정 바라는 목표가 미련이 아닌, 소망이 되길 바라며... "친구야~ 술먹고 싶으면 또 연락혀~!!'


  1. 지방직 공무원 시험이 5월 23일이군요. 한달남았네요. 수험생 여러분들 모두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본문으로]